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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슨 빵을 해주나”…갓 구운 빵으로 익어가는 산골의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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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26-05-26 09:46

“오늘은 무슨 빵을 해주나”…갓 구운 빵으로 익어가는 산골의 돌봄

작성일 26-05-26 조회수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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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금사면 주록리에서 시니어 공유공간 ‘노루목향기’와 부녀회원들이 매주 함께하는 빵 나눔 ‘달달한 함께 동행’. 한 끼 식사 대용으로 인기가 좋은 호텔식 식빵과 초코쿠키를 만든 마을 주민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노루목향기 제공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25) 여주시 주록리 시니어공유공간 ‘노루목향기’

5월14일 목요일 아침 9시,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시니어 공유공간 ‘노루목향기’의 공유부엌이 북적였다. 앞치마를 두른 마을 부녀회원들이 강력분 400g을 큰 그릇에 쏟고 설탕과 소금, 이스트와 버터, 달걀을 더했다. 물 220g을 부어 반죽을 치대기 시작하자 손등에 금세 땀이 몽글몽글해졌다. 이 작업을 세 차례나 더 반복해야 오늘의 제빵 분량을 맞출 수 있다.

한쪽에서는 호두파이 반죽이 준비됐다. 버터와 크림치즈에 중력분을 섞어 파이지를 빚고, 달걀과 황설탕·물엿에 계피를 넣은 필링이 그릇 안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이날의 메뉴는 호텔식 식빵과 호두파이. 화이트보드에는 이날 쓸 재료의 분량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작업은 길다. 아침 9시 무렵 시작한 빵 만들기는 빵이 노릇하게 익는 오후 두세 시, 늦으면 네 시까지 이어진다. “하루를 통째로 내야 하는 일”이라고 부녀회장 홍순애(65)씨는 말했다. 처음엔 주록리 부녀회원 31명 대부분이 제빵을 배우고 싶다며 나섰지만, 품이 워낙 많이 든다는 걸 알고는 일부만 남았다. 지금은 이은주(57) 강사를 포함해 열두 명 남짓이 두 팀으로 나뉘어 격주로 모인다. 한 주는 노루목향기 공유부엌에서, 한 주는 마을회관에서 빵을 굽는다.

5월 14일 노루목향기의 공유부엌에서 마을 부녀회원이 빵 반죽을 하고 있다.
5월 14일 노루목향기의 공유부엌에서 마을 부녀회원이 빵 반죽을 하고 있다.
이은주 강사(맨 오른쪽)의 시범에 따라 부녀회원들이 얇게 민 파이 반죽을 틀에 앉히고 그 위에 호두를 얹어 호두파이를 만들고 있다.
이은주 강사(맨 오른쪽)의 시범에 따라 부녀회원들이 얇게 민 파이 반죽을 틀에 앉히고 그 위에 호두를 얹어 호두파이를 만들고 있다.

“오븐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지”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노루목향기에 사는 심재식(73)씨는 이은주 강사와 함께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그런데 이 강사가 직접 만든 빵을 들고 오는 것이었다. “먹어보지도 못한 빵을 가져오시는데 그렇게 맛있더라고. 그래서 ‘선생님, 빵 만들 줄 알아요? 우리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물었지.”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오자, 심씨의 셈은 단순했다. “나는 제빵이 오븐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한 줄은 하나도 몰랐지.” 발효기와 반죽기까지 갖춰야 하는 본격적인 제빵 클래스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주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하니까 시작이 된 거야.”

가볍게 응한 건 이은주 강사도 마찬가지였다. “동네분들 몇 분 모아서 집에서 하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심재식씨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이나 글씨는 배우면 자기 것으로 끝나지만, 음식은 다르다는 것. “처음부터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식품영양을 전공하고 반도체 회사에서 영양사로 일하다 2019년 귀촌한 이은주씨에게도 빵은 좋은 매개였다. “여기 와서 이웃과 소통이 없었거든요. 음식이 참 좋은 재료라서, 안 드셔보셨을 마을 분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 싶었어요.”

배달 준비를 마친 빵들. 노루목향기 제공
배달 준비를 마친 빵들. 노루목향기 제공
은둔 생활을 하던 한 주민이 직접 만든 빵을 이웃에게 전하며 ‘달달한 함께 동행’에 참여하고 있다. 노루목향기 제공
은둔 생활을 하던 한 주민이 직접 만든 빵을 이웃에게 전하며 ‘달달한 함께 동행’에 참여하고 있다. 노루목향기 제공

세 할머니가 닦아놓은 길

노루목향기 공유부엌의 뿌리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록리 산골, 꽃이 가득한 정원과 나지막한 지붕의 전원주택에 동갑내기 세 사람, 심재식·이혜옥·이경옥씨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혜옥·심재식씨가 티베트 여행에서 만난 한 지인의 소개로 주록리의 빈터를 발견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 빈터에 지어진 집이 바로 '노루목향기'다.

세 할머니가 한집에 살며 노년의 돌봄과 경제적 자립을 고민했다. 코로나 시기에 집 마당을 열어 마을 공동체 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방송국 앵커 체험처럼 시골 할머니 혼자라면 선뜻 하기 힘든 활동을 앞장서서 기획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교복을 입고 떠나는 ‘평생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인 수학여행도 추진했다. 노년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본 셈이다. 세 사람이 함께 살며 마을 공동체 활동을 펼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차츰차츰 알려졌다.

노루목향기 입구에 마을공동체와 함께해 온 이곳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액자가 놓여 있다.
노루목향기 입구에 마을공동체와 함께해 온 이곳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액자가 놓여 있다.

기다려지는 빵, 웃음이 된 빵

지금 노루목향기의 가장 따뜻한 일은 빵 나눔이다. 홀로 사는 마을 어르신 16명에게 부녀회원들이 직접 만든 빵을 전하는 ‘달달한 함께 동행’이 그것이다. 갓 구운 빵은 따뜻하고, 새롭고,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별미다. 어르신들은 “오늘은 무슨 빵을 해주나” 하며 목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빵 나눔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름의 조사도 했다. 처음엔 반찬 나눔이 후보였다. “물어보니까 반찬은 입에 맞을 수도, 안 맞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런데 빵은 우유 한 잔이면 한 끼가 되잖아. 그래서 빵으로 하자 했지.” 심재식씨의 말이다. 요리도구가 여럿 필요하다는 걸 알고, 심씨가 마을 이장에게 도움을 청하니, 이장이 흔쾌히 마을 사업비로 오븐과 반죽기, 발효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2025년 봄, 제빵 클래스 ‘달달한 함께 동행’이 문을 열었다.

노루목향기의 앞마당은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2024년 5월에 열린 제108회 마을만들기 전국네트워크 대화 모임. 노루목향기 제공
노루목향기의 앞마당은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2024년 5월에 열린 제108회 마을만들기 전국네트워크 대화 모임. 노루목향기 제공

빵 나눔의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빵을 혼자 사는 어르신들에게만 나누다 보니, 한 남성 주민이 “이혼을 해야 빵을 얻어먹나”라고 농을 던져 모두가 박장대소했다는 것이다. 농담이지만, 빵 나눔이 마을에서 얼마나 환영받는지를 보여준다.

달달한 함께 동행이 부녀회원들에게 인기인 이유도 비슷하다. 직접 만들어 함께 먹고, 집에 가져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여주·이천 일대엔 제빵 학원이 없어, 배우려면 성남까지 다녀야 했던 귀한 기술이다. “빵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먹고,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가 있다”고 홍순애씨가 말했다.

이은주 강사에게 매주 무엇을 구울지 정하는 일은, “행복한 고민”이자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숙제다. 그는 빵 하나와 과자 하나, 두 가지를 준비한다. 욕심 같아선 “옛날 사람들은 이 빵을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까지 짚어가며, 깊이 있게 가르치고 싶지만, 배우는 마을 주민들의 눈높이와 나눔 받는 어르신들의 입맛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따라오기 어려운 걸 만들면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쉬워도 안 되고요. 그동안 못 드셔본 빵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 밸런스를 맞추느라 매주 고민이 많아요.” 이은주 강사가 말했다. 무엇보다 그가 지키는 건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다. “내가 행복해야 맛있는 빵이 나와요. 이스트는 살아 있는 미생물이거든요. 우리랑 같은 생명체를 잘 살려서 최고의 빵을 만드는 거예요.”

2024년 5월 노루목향기에서 열린 제108회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대화 모임에서 이혜옥씨(맨 왼쪽)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노루목향기 제공
2024년 5월 노루목향기에서 열린 제108회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대화 모임에서 이혜옥씨(맨 왼쪽)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노루목향기 제공

빵이 잇는 사람들

빵 만들기는 이 마을이 오래 쌓아온 ‘재능 나눔’의 한 갈래다. 주록리에서는 오래 전부터 재능이 있는 마을 주민이 강사가 되어 이웃을 가르치곤 했다. 귀촌한 세 할머니도 마을 풍물패에 합류하면서 마을 주민들과 그렇게 교류를 시작했다. 풍물과 난타로 시작한 배움은 그림과 글씨로, 다시 빵으로 이어졌다.

올해 새로 문을 연 것은 양봉이다. 마을에 사는 경기도 (사)한국한봉협회의 한 임원이 재능 기부로 강의를 맡아, 집집마다 토종벌 벌통까지 만들어주기로 했다. “우리 마을엔 재능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축제를 열어도 외부 공연자가 필요 없을 정도”라는 게 이혜옥(73)씨의 말이다. 이은주 강사의 제빵 클래스도 그렇게, 귀촌민의 재능이 마을 돌봄을 이끌고 있다.

다른 동네에선 귀촌한 주민의 부녀회 가입조차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지만, 주록리에서는 원주민과 자연스레 화합한다. 귀촌한 이웃들은 마을 행사와 체육대회에 후원으로 힘을 보태고, 마을은 연말이면 주민들에게 쌀 10㎏씩을 나눈다. 빵을 굽는 부엌은 귀촌민과 원주민이, 또 젊은 세대와 어르신이 자연스럽게 마주 앉는 자리가 됐다.

이 어울림에 마을 부녀회장을 지냈던 조정분(74)씨도 동참했다. 제빵 클래스 참여에 그는 처음엔 망설였다. “나눔을 하겠다니, 그러면 양이 상당히 많을 텐데 엄두가 안 나겠다 싶었지. 재료비는 또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나, 그런 생각도 했고.” 그런데 막상 해보니 달랐다. “다 되더라고. 지금은 식은 죽 먹기야.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빵은 남편도 기다린다. “농사일 하고 들어와서 빵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하지. 아주 좋아해.”

노루목향기가 빵 나눔 '달달한 함께 동행'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3월 여주장터 한마당 축제에서 마들렌과 호두과자, 뻥튀기를 팔고 있다. 노루목향기 제공
노루목향기가 빵 나눔 '달달한 함께 동행'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3월 여주장터 한마당 축제에서 마들렌과 호두과자, 뻥튀기를 팔고 있다. 노루목향기 제공

계속 굽기 위하여

달달한 함께 동행 운영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고민은 재료비다. 한 번 구울 때마다 10만원 넘게 들어간다. 올해는 다자간협력사업(아름다운재단, 경기도,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 MYSC 협력)과 동네 안팎의 후원으로 꾸려가지만, 앞으로의 지속가능성이 문제다. 재료비를 마련하려고 노루목향기는 호두과자와 뻥튀기를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소리가 한몫, 냄새가 한몫”하는 바람에 제법 잘 팔려서, 아예 즉석식품 제조 허가까지 받았다. 다만 빵 판매는 아직이다. “강사님이 우리더러 아직 빵 팔 단계가 아니래. 기술이 더 익어야 한다고. 그래서 좀 더 배워서 팔려고.”(심재식씨)

노루목향기에 함께 사는 동갑내기 이혜옥(왼쪽부터)·심재식·이경옥 씨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노루목향기에 함께 사는 동갑내기 이혜옥(왼쪽부터)·심재식·이경옥 씨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심재식씨의 셈법은 소박하면서도 야무지다. 지난해 동네 안팎에서 십시일반 모인 후원금은 300만 원가량. 하지만 이렇게 들쭉날쭉한 금액보다 그가 그리는 건 꾸준함이다. “어떤 사람은 10만원, 어떤 사람은 5만원…. 이렇게 불특정하게 모으는 것보다, 한 달에 1만원씩 내는 고정 후원자 60명만 있으면 재료비 걱정 없이 계속할 수 있겠더라고. 부담 없는 금액으로, 꾸준히.” 그래서 노루목향기의 10년 활동을 기록하고 후원도 받을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만들 작정이다. ‘주식회사 노루목향기’를 세워 생활용품 판매와 농촌 민박으로 자립의 길도 넓혀가는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내려온 산골에서, 할머니들은 오늘도 새 일을 궁리한다.

세 할머니의 시골 집에서 시작된 서로 돌봄은 이제 마을의 부엌으로, 빵을 기다리는 이웃들의 식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노루목향기의 오븐은 따뜻하다.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이 함께 참여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역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청년·여성·노인 등 다양한 주체가 환경·문화·교육·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협력 프로젝트,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동네의 특별한 현장, 꼭 알리고 싶은 공동체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동네 이름, 추천 이유, 간단한 소개(사람·단체·프로젝트 등)를 ejung@hani.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글·사진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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