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에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목욕탕이 있다
페이지 정보

안성에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목욕탕이 있다
본문
“자,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 손바닥을 밀어보세요.”
지난 10월22일 오후 1시께 경기 안성시 일죽면 송천리 서부경로당에서 ‘일죽동친’ 건강운동리더 하인녀(65)씨가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안성의료사협)에서 만든 근감소 예방과 낙상 방지 운동 동영상을 보며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 의자에 앉은 어르신들이 천천히 팔을 앞으로 뻗었다. 건강운동리더와 손바닥을 마주하며 힘을 줄 때는 작은 신음이 섞였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맴돌았다. 뻣뻣하던 몸이 조금씩 풀리면서 경로당도 어느새 따뜻해졌다.
동네 친구들, 건강을 배우고 봉사하다
‘일죽면의 동네 친구들’을 뜻하는 일죽동친의 시작은 단순했다. 고령화로 생긴 돌봄 공백을 ‘동네 사람들끼리’ 매워보자는 것이었다. 일죽지역 건강 마을 만들기에 힘써온 안성의료사협이 설계자로 나서, 일죽동친 1기 건강돌봄리더(2024년)와 2기 건강운동리더(2025년)를 모집·교육했다. 1기는 ‘노인건강 돌봄지도사 과정’에서 혈압·혈당 측정법, 심혈관질환 예방 교육, 안전 목욕 가이드 등을 배웠다. 20시간 교육과정을 밟고 시험에 통과하면 민간자격증(의료사협연합회)이 받았다.
또 1기와 2기 모두 낙상 예방과 근감소증 관리 운동법 중심의 ‘건강운동리더 양성과정’을 이수했는데, 이 과정은 12시간 과정으로 진행됐다. 1기 18명은 일죽목욕탕에서, 2기 24명은 경로당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소희 안성의료사협 팀장은 “일죽동친은 마을의 건강을 마을 주민이 스스로 지키는 생활 돌봄 모델”이라며 “행정이나 복지기관이 닿지 못하는 지역에 마을 주민이 ‘건강 리더’로 활동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안성시 일죽면 송천리 일죽목욕탕은 경기도 사회적경제원의 ‘사회환경문제 해결사업’의 하나로 리모델링을 마치고 2024년 11월 다시 문을 열었다. 글로벌 마케팅 기업 이노션이 안성시, 경기도 사회적경제원, 안성의료사협, 월드비전 등과 함께 추진한 ‘소셜 공간 리브랜딩 프로젝트’의 첫 사례로, 1997년에 건립된 후 27년간 리모델링 없이 운영돼 온 공간을 전면 재설계한 것이다. 핵심 목표는 고령층의 목욕 중 안전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목욕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죽목욕탕은 입구에서 탈의실, 탕 내부까지 전체 구조를 새로 설계해 히트쇼크(급격한 온도 변화) 등 고령층의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10분마다 알람이 울려 ‘탕 안 체류 시간’을 알려주고, 탕 내부와 복도에는 비상 호출 버튼(‘SOS 벨’)을 설치했다. 입장 전에는 얼굴 인식 키오스크가 작동돼 혈압과 호흡수를 자동으로 측정하고, 컨디션에 따라 ‘오늘의 목욕 가이드’를 안내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심박수가 빠르면 “오늘은 짧게 입욕하세요”, 혈압이 높으면 “온탕을 피하세요” 같은 안내가 나온다.


마을이 함께 만든 ‘안전한 목욕탕’
무엇보다, 일죽목욕탕이 ‘마을이 스스로 돌보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일죽동친 1기 건강돌봄리더들이 안전사고 예방 지킴이로 나선 덕분이다. 유소희 팀장은 “목욕탕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심혈관 건강은 목욕탕을 안전하게 이용하는 중요한 요인이기에 건강 리더를 육성해 안전사고를 예방하도록 지원했다”고 말했다.
건강돌봄리더들은 안성의료사협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현장 대응력을 키워왔다. 우용제씨는 탕 안에서 알림벨이 울릴 정도로 오래 있던 어르신의 팔을 붙잡고 나온 적이 있다. “시원하다고 버티시던 어르신이 나오자마자 어지러워하시고 구역질도 하셨죠. 바로 부축해서 응급조치했어요. 그때 ‘안전하게 목욕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어요.” 이성엽(70)씨도 실신 사고를 목격했다. “남성 목욕탕에서 실신 사고가 있어서 119까지 왔어요. 역시 너무 오래 탕에 있었기 때문이죠. 안전수칙을 지키시라고 말씀드렸는데도 가볍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 후로 사명감을 갖고 건강체크를 미리하고 목욕탕에 들어가시라고 일일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매달 운영하는 ‘동행목욕의 날’은 동네 어르신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 건강돌봄리더들이 혼자 목욕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을 모시고 목욕탕을 함께 가서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입욕해 등도 밀어드리고 식사까지 함께한다. 손명숙(71)씨는 “목욕탕 봉사를 갈 때마다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어르신들 얼굴이 한결 환해지고, ‘오늘도 같이 와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들으면 하루 피로가 다 풀려요. 어느새 제가 그날을 기다리게 돼요.”
정영자(73)씨가 말을 이었다. “어르신들이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는 병원도 들르고, 시장도 보고, 밀린 일들도 하세요. 경로당에 가서는 ‘오늘 너무 좋았다’며 자랑을 하시니까 다른 동네 어르신들도 ‘나는 언제 데려가 주나’ 하며 기다리시기도 해요.”
건강운동, 몸을 펴고 마음을 여는 시간
일죽동친 2기 건강운동리더들은 ‘찾아가는 건강운동봉사팀’을 꾸려 일죽면 경로당 6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운동을 지도한다. 구강운동, 손 근력 강화, 균형 잡기 등 실습형 건강체조를 통해 낙상을 예방하고, 놀이와 노래를 엮은 ‘기억운동(인지자극)’ 프로그램으로 활력을 불어넣는다. 만성질환자나 근력 저하 어르신은 안성의료사협과 연계해 보건상담도 받도록 한다.
이 프로그램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어르신 120여 명이 참여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어르신들은 “혼자서는 안 하게 되는데 같이 하니 재미도 있고 몸이 덜 아프다”고 했다. 서부경로당에서 만난 건강운동리더 양석조(71), 김상숙(65), 하인녀, 이복희(62)씨는 “예전에는 동네에서 눈인사만 나누던 어르신들과 마음을 나누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보람된 순간은 언제인가요?
양석조: “처음에 어르신들이 ‘뭐 하러 왔냐’ 하시던 분들도 이제는 ‘다음 주 수요일에 또 오지?’ 하고 기다리세요. 그 말 한마디에 다 녹아요. 나이 들어서 새롭게 연결되는 관계가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어요.”
김상숙: “혼자 계시는 어르신들이 참 많잖아요. 우리가 가면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몰라요. 말벗이 되어드리고, 식사도 같이하고, 그냥 손 한번 잡아드리면 얼굴이 환해지세요.”
하인녀: “사람들은 시골에서 농사일을 많이 하지만, ‘운동’은 거의 안 해요. 몸을 움직여도 노동이고, 마음은 닫혀 있죠. 그런데 함께 웃으면서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몸도 풀리고 마음도 열려요. 어르신들이 ‘오늘 또 오냐’ 하시면서 기다리실 땐 정말 보람을 느껴요.”
―나에게 준 변화가 있다면.
양석조: “집에만 있으면 도태돼요. 나이 들어도 머리를 써야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해요. 일죽동친은 그걸 가능하게 해줬어요. 하루라도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게 운동보다 더 큰 힐링이에요.”
김상숙: “사실 봉사는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해보니까 나를 위한 일이더라고요. 어르신들이 웃으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봉사는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이 건강해지는 일’이라는 걸 요즘 매일 느껴요.”
하인녀: “35년간 일하다 퇴직하고 나니 ‘이제 나는 뭐 하지?’ 싶었는데, 봉사하면서 세상 밖으로 한 발 나왔죠. 그냥 집 안에만 있었으면 몰랐을 거예요. 봉사는 ‘나를 찾는 길’이기도 해요.”
이복희: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많아지고 웃음이 돌아요. 동네 사람들끼리도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지고요. 그냥 봉사라기보다는 ‘같이 노는 시간’처럼 느껴져요.”
일죽동친의 활동은 봉사를 넘어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돌봄 체계를 구축하는 의미 있는 실험이다. 1기의 목욕탕 안전사고 예방과 2기의 경로당 건강운동 활동이 어우러져 일죽면 전체가 서로 돌보는 건강한 공동체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이 함께 참여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역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청년·여성·노인 등 다양한 주체가 환경·문화·교육·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협력 프로젝트,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동네의 특별한 현장, 꼭 알리고 싶은 공동체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동네 이름, 추천 이유, 간단한 소개(사람·단체·프로젝트 등)를 ejung@hani.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글·사진 정은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기자 ejung@hani.co.kr
관련링크
-
한겨레 관련 기사 링크주소 :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1225577.html
110회 연결
- 이전글“회복력은 지역의 생존력”…한겨레 지역 회복력 평가 시상식 열려 25.11.05
- 다음글세대 맞춤형 복지 구리시, 아이·노인 살기 좋아요 25.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