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잇는 손바닥정원, 마을과 마음에 꽃을 피우다
페이지 정보

이웃을 잇는 손바닥정원, 마을과 마음에 꽃을 피우다
본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동쪽, 군사유적지 연무대와 맞닿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입구. 이곳에선 도시와 역사가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수원화성의 견고한 성벽을 등지고, 동문인 창룡문 방향의 옛길을 따라가면 오래된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담장 아래 작은 정원에는 꽃과 풀이 가득한 이곳을, 주민들과 방문객들은 “수원에서 가장 달라진 동네”라고 부른다.
손바닥정원이 피운 마을공동체
골목을 걷다 보면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손바닥정원’이다. 한때 주차 차량과 쓰레기로 어지럽던 곳곳엔 방부목 화분과 색색의 꽃들이 골목을 수놓고 있다. 화분 옆에는 ‘매향사모 회원들이 직접 심고 가꾼 꽃입니다’라는 손팻말을 만날 수 있다.
“손바닥정원을 조성할 때만 해도 누가 관리하나 걱정했는데, 이젠 다들 자발적으로 물을 주고 꽃씨도 나눠요. 동네 구석구석이 다 우리들의 정원이에요.” 손바닥정원사 윤연희(71)씨의 말처럼, 작은 정원이 생기면서 동네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팔달구청에서 연무대까지 이어지는 매향동엔 약 660세대, 1300여명의 주민이 터를 이루고 산다. 대부분 단독주택이고, 초·중·고교 6곳이 인접해 있지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이곳은 깊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인접 신풍동·장안동은 도시재생과 커뮤니티 활성화로 ‘살기 좋은 동네’로 자리 잡았지만, 매향동은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땅값과 집값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왜 우리 동네만 투자를 안 하느냐”는 주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박탈감은 마을 풍경까지 암울하게 만들었다. 잡초와 쓰레기가 치워지지 않아 마을 주변은 어수선했다. 송종(77)씨는 “수원화성 안이 시골스러우면서도 편의시설은 다 있구나! ”싶어서 이 동네에 정착했지만, 막상 살아보니 침체가 깊었다고 당시를 기억한다.


“청소라도 제대로 해보자”…매향사모의 출발
2022년, 변화의 움직임이 꿈틀댔다. “우리도 뭔가 해보자”는 주민들의 결의가 모였고, 9~10월 마을 만들기에 관심 있던 주민들과 4명의 통장이 먼저 뜻을 모았다. 한 달 만에 ‘매향동을 사랑하는 모임(매향사모)’이 15명으로 공식 출범했고, 손수 250통의 손편지를 써서 돌려 회원 11명이 새로 들어왔다. 지금은 남성 9명, 여성 31명 등 40명 정도다.
“매향사모 노래도 만들었어요. 전국에서 마을 노래 있는 동네 별로 없을 겁니다. 월례회의 시작과 끝마다 합창하는데, 이젠 아주 잘해요.” 김충영(70)씨가 자랑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초심을 정신으로 삼아, 매향사모는 매월 월례회의와 마을청소, 해마다 세 차례 단합대회(봄·가을 공동 음식 나눔, 연말 송년회, 연초 떡국 데이)도 열었다.
회장 송종씨는 “처음엔 그냥 ‘청소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골목 구석구석을 쓸었다”고 말한다. 이 작은 실천들이 모여 마을 문화를 바꾸었다. 1983년부터 40년 넘게 매향동에 사는 임인선(71)씨가 변화를 증언했다. “예전엔 골목마다 쓰레기가 쌓여 있었는데, 몇 년 사이 주민들이 직접 나와 청소하고, 풀도 뽑는 문화가 잡혔어요. 폐기물도 아무렇게나 버렸는데, 이제는 다들 스티커를 붙여 정식으로 내놓습니다.”

‘손바닥정원’ 825곳, 마을의 온기 피우다
지방정부의 공모사업은 마을 만들기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2023년, 수원시 ‘손바닥정원’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매향사모는 골목과 공터에 꽃을 심고, 버려진 공간을 정원으로 꾸몄다.
“우리한테 딱 맞다 싶었죠. 원래 청소하다가 가드닝 하려고 했는데 수원시에서 도와주니 너무 좋았어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섰죠.” (윤연희씨)
“스티로폼 박스, 고무통에 야채 심었던 자리에 시 지원을 받아 방부목 화분을 뒀어요. 쓰레기 쌓이던 공간도 새 화단으로 탈바꿈했죠.” (채영자씨·71)
“예전에는 아무 데나 쓰레기 버렸는데, 화분 놓고 꽃을 심으니까 이젠 ‘쓰레기 버리기 미안하다’는 분위기가 생겼어요.” (김충영씨)
‘내 통 먼저 해달라’며 통장들이 앞장서 손바닥정원을 만들어 새로운 화단이 11곳이나 조성됐다. ‘꽃씨 은행’ 사업을 통해 23종의 꽃씨도 이웃 마을에 기증했다. 이범석 손바닥정원단 단장은 정원의 힘을 이렇게 설명했다.
“단순히 미관 개선이 아니라, 버려진 장소를 깨끗하게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을 커뮤니티가 살아납니다. 사람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사회가 밝아지는 효과가 커요.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혼자 사는 경우가 많은데, 꽃을 가꾸며 마음의 치유와 건강, 외로움을 극복해요. 정원이 곧 마을의 활력이자 치유의 공간입니다.”
수원시의 손바닥정원은 6월 말 현재 825곳, 손바닥정원사는 1026명에 달한다.




꽃과 흙이 잇는 이웃, 치유가 시작되는 곳
지난해에는 20년 넘게 버려진 삼일공고 옆 260평가량 학교 재단 용지를 주민 텃밭 정원으로 바꿨다. 학교·주민·팔달구청 협의로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주민 17명과 교사 6명이 제비뽑기로 2~3평씩 나눠 텃밭을 조성했다. 주민들은 힘을 모아 원두막도 직접 짓자 이곳은 마을의 소통과 교류가 시작됐다.
“처음에 청소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 뻔했어요. ‘세상에 할 일 없어 그 고생 하냐’는 얘기도 들었죠. 그래도 직접 작물을 심으니 다 같이 기뻐하고, 수확한 농작물을 이웃과 나누니까 재밌더라고요.” (채영자씨)
“젊은 초보 주민들이 ‘이건 언제 심어요?’, ‘고추는 왜 이렇게 자라요?’ 이렇게 물으면, 꽃도 키우고 채소도 심어본 어르신들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세요. 원두막에 모여 수다도 떨고, 같이 차도 마시고요.” (윤연희씨)
지난해 6월 ‘비빔밥 데이’, 10월 텃밭 정원 축제 등 계절마다 잔치도 열렸다. 손수 기른 작물은 취약계층 반찬을 챙기는 ‘연무정 급식소’에도 기부했다. 텃밭은 주민 교류와 작물 나눔의 공간이자, 공동체의 중심이 됐다. 올해는 경기도 마을 정원 공모사업에 선정돼 1억5천만원 지원을 받아 마을 텃밭과 정원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다음은 지난달 29일 만난 매향사모 회원들과의 일문일답.
― 텃밭 정원, 단순한 농사 그 이상인가.
김충영: “동네 분들끼리 ‘나 고구마 심었는데 너는 뭐 심었냐’ 물어보고 서로 비교도 하죠. 아침저녁으로, 그게 재미에요.”
채영자: “같이 농사짓고, 수확물 나누고, 파티하면 40~50명씩 모여요. 안 하겠다고 하다가도 하다 보면 재미있어서 또 한다니까요.”
송종: “누군가는 집 안에만 있다가 나와서 흙도 만지고 이웃이랑 이야기하니까 우울했던 마음도 나아졌다고 해요.”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송종: “점점 하다 보니까 동네가 깨끗해지고, 내 이웃도 즐거워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기분 좋게 만들어주잖아요. 매일 청소하고 꽃 가꾸는 게 이웃한테 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채영자: “첫해는 멋모르고 했고, 두 번째 해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만두고 싶었고, 세 번째 해는 즐거워서 하게 돼요. 칭찬도 들으니까 더 할 힘이 나고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윤연희: “내가 심은 꽃이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피면 그게 얼마나 경이로운지 몰라요. 새벽에 혼자 채송화 핀 걸 보는데, 나도 꽃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내가 좋으니까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손바닥정원에서 시작된 동네의 기적
수원 매향동의 마을공동체 매향사모가 만든 변화는 분명하다. “동네가 이렇게 깨끗해 본 적이 없어요”라는 주민들의 자부심, “손바닥정원에 심을 꽃모종을 나눠요”라는 자발적 참여, 그리고 “정을 나누는 동네 기분이 난다”는 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골목골목에 싹트고 있다.
매향동은 이제 단순한 생활환경 개선을 넘어, ‘함께 만드는 지속가능한 마을’, ‘문화가 살아 있는 마을’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채비에 한창이다. 송종씨는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생활 환경이 많이 나아졌으니, 올해는 시, 그림, 사진 등 문화 예술 활동 쪽으로 확장하려 해요. 주민들이 모여서 직접 배우고, 작품도 만들어 마을 곳곳에 전시하려 하죠. 우리 동네가 ‘도시 속 문화공동체’의 모델이 되었으면 합니다.”
매향사모는 ‘시와 그림이 있는 매향 마을’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주민들이 함께 시, 그림, 사진을 배우고, 25점의 작품을 선정해 아크릴 액자로 제작해 마을에 상시 전시할 계획이다. 골목 화단 가꾸기, 텃밭 정원, 꽃씨 나눔 등 환경 사업을 바탕으로 이제는 지역 문화와 예술까지 공동체 활동을 넓혀가고 있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참여와 열정이 모여 오늘의 매향동을 빛나게 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물결은 새로운 꿈을 향해 내일 또 골목과 골목을 이어간다.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이 함께 참여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역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청년·여성·노인 등 다양한 주체가 환경·문화·교육·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협력 프로젝트,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동네의 특별한 현장, 꼭 알리고 싶은 공동체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동네 이름, 추천 이유, 간단한 소개(사람·단체·프로젝트 등)를 ejung@hani.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글·사진 정은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기자 ejung@hani.co.kr
관련링크
-
한겨레 관련 기사 링크주소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11417.html
115회 연결
- 이전글쓰레기를 돈으로, 자부심은 덤으로 25.08.18
- 다음글아이 셋 엄마, 어떻게 협동조합을 만드냐고요? 2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