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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간판은 마을 나이테”…청년들이 모은 꽃동네 ‘마을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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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6-03-09 09:22

“낡은 간판은 마을 나이테”…청년들이 모은 꽃동네 ‘마을데이터’

작성일 26-03-09 조회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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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봄,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꽃동네’.

회의 장소로 향하던 청년 기획자 유윤하(28)씨는 가파른 골목길, 칠이 벗겨진 하얀 철문 옆에 놓인 노란 고추장 통 하나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쓰임을 다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물건이었다.

“골목에서 노란 고추장 통을 봤을 때, 선명한 노랑이 아니라 빛이 빠진 듯 애매한 노랑이었어요.” 오랜 시간 햇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채도가 빠져버린,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색이었다. 유씨는 그 빛깔이 사람 손길이 뜸해진 외벽과 골목의 사물들처럼 꽃동네의 세월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고 느꼈다. “‘빛바랜’이라는 말이 주는 낡음과 허전함이 꽃동네와 닮아 보여서, 그때부터 이 동네의 색을 다시 보게 됐어요.”

유씨가 마주한 ‘애매한 노랑’은 청년들이 꽃동네의 색을 채집하고 기록하기 시작한 소중한 출발점이 되었다. 꽃동네는 금오동 하금로와 거북로 일대에 자리한 자연부락이다. 한때는 견고한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마을 축제가 열리기도 했지만, 2011년 미군 기지 철수 이후 주변 개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동네의 공기는 달라졌다.

뉴타운(재정비촉진지구)으로 지정됐다가 해제되는 과정을 겪었고, 이후 재개발 역시 추진과 표류를 반복했다. 재개발을 두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찬반이 갈리며 갈등이 깊어졌다. 재개발 절차는 진행됐지만 정작 시공사 참여가 지지부진해 사업은 제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언젠가 헐릴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길어지자, 집을 손보거나 가게 간판을 새로 달기 같은 개인의 투자는 자연히 미뤄졌다. 여기에 고산 신도시와 양주 옥정지구 등 대규모 신도시가 인근에 조성되면서 젊은 층 이탈이 겹쳤다. 개발 계획이 수차례 바뀌고 지연되면서 마을에는 재개발에 대한 피로감이 쌓였고, 외벽과 간판은 제때 손보지 않은 채로 남겨져 꽃동네에 쌓인 시간을 드러내는 흔적이 됐다.

꽃동네의 ‘마을색’을 채집하다​

누군가에게는 방치된 장소처럼 보이는 이곳에서 청년들은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마을에 쌓인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보기로 한 것이다. 꽃동네에 거점을 둔 청년 기획자 연대 조직 ‘프로젝트 산장’을 중심으로 스무살이 협동조합, 아트볼프로젝트, 로컬피스 등 의정부 청년 단체들이 모여 ‘꽃동네 빛바랜 연구소’를 꾸렸다.

청년들이 처음 주목한 것은 마을의 ‘색’이었다. 청년들은 골목길을 구분선 삼아 마을을 6개 구역으로 나눴다. 각 구역을 맡은 청년들은 꽃동네의 시간이 묻어 있는 사물과 외벽을 관찰 대상으로 정했다.

날이 맑았던 2024년 9월 어느 날, 관찰 대상들을 오전 11시와 오후 4시 두 차례 촬영했다. 시간대에 따라 햇빛의 방향과 그늘이 달라질 때 색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도 함께 남기려는 목적이었다. 촬영 지점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표시해 두었고, 모두 305장의 이미지를 모았다.

수집한 이미지에서 추출한 색은 인쇄용 색상 모델인 시엠와이케이(CMYK) 수치로 옮겨 적었다. 예컨대 빛바랜 고추장 통의 색은 ‘파랑(C)=27, 자주(M)=27, 노랑(Y)=71, 검정(K)=0’로 기재됐다. 이렇게 정리한 11가지 ‘꽃동네 마을색’은 정량화된 수치와 ‘안매운노랑고추장통색’, ‘덧칠된 수영장색’, ‘메로나에 콜라 탄 색’ 등의 이름으로 남았다.

청년들은 중고 거래로 모은 폐 크레파스를 녹여 그 값에 맞춰 다시 배합해 새 크레파스를 만들었다. 유씨는 “구체적인 이름이 없으면 존재는 금방 잊히기 쉽다”며 “애매하게 바랜 색들에 수치와 이름을 붙여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제작된 ‘빛바랜 크레파스’는 이름 없이 지나치기 쉬운 골목의 표정을 붙잡아두는 도구가 됐다. 청년들은 이 크레파스로 자화상을 그리며, 마을의 색을 ‘나의 경험’으로 만들었다. 마을의 색을 정리하는 과정은 재개발 논의 속에서도 소멸하지 않을 꽃동네만의 ‘자기 자료’를 쌓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닦아내 드러낸 골목의 이름들

마을의 색을 기록하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간판으로 이어졌다. 폐업 뒤 수거되지 않아 모서리가 부서지고 탈색된 간판, 밤이 되어도 더는 불이 들어오지 않는 간판들, 이른바 ‘죽은 간판’은 동네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꽃동네처럼 재개발 논의가 길어지고 정비 시점이 불확실한 곳에서는 가게가 문을 닫아도 간판을 떼거나 새로 다는 일이 뒤로 밀리기 쉽다. 새 임차인이 들어오지 않거나, ‘어차피 곧 정비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손을 대는 결정 자체가 미뤄지기 때문이다. 개·폐업 여부만 남는 행정 데이터와 달리, 이 간판들은 남아 있는 상태 자체로 마을 변화의 시간을 드러냈다.

청년들은 현재 남아 있는 간판의 이미지를 수집하는 한편, 지도서비스의 로드뷰 기능을 활용해 2011년부터 골목을 되짚었다. 유치원과 연탄집, 미용실, 동네 아이들의 사랑방이었던 미술학원까지, 지금은 사라진 상점의 간판을 한 장면씩 모았다. 그리고 화면 속 기록을 골목으로 다시 되돌리는 방식을 고민했다.

이들이 선택한 방법이 스텐실이다. 스텐실은 글자나 무늬 모양이 뚫린 판(틀)을 표면에 대고, 그 위로 페인트나 스프레이, 물감 등을 칠해 같은 모양을 반복해 찍어내는 방식이다. 청년들은 간판의 글자체를 따서 디지털로 정리한 뒤, 그 글자 모양대로 스텐실 틀을 제작했다.

다만 이들은 일반적인 그라피티처럼 벽에 덧칠하는 대신, 스텐실 틀을 대고 고압 세척기로 글자 부분만 닦아내는 방식을 택했다. 틀 밖은 그대로 두고 글자 모양이 뚫린 부분으로만 물줄기가 지나가게 하면, 그 자리의 묵은 때가 벗겨지며 주변보다 밝은 표면이 드러난다. 글자를 새로 그려 넣는 것이 아니라, 벽에 쌓여 있던 먼지와 때의 층을 걷어내 글자를 ‘나오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남긴 글자들은 장소에 따라 지속 시간이 달랐다. 유동 인구가 많은 버스정류장 인근의 글자는 발길과 먼지, 손때가 겹치며 며칠 만에 다시 흐려졌지만, 외진 골목의 글자들은 더 오래 유지됐다. 스텐실 글자가 옅어지는 속도 자체가 그 공간을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지나고, 얼마나 자주 닿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강현욱 프로젝트 산장 대표는 간판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행위를 “공간에 대한 예의이자 마을에 대한 돌봄”이라고 말했다. “관심이 끊긴 장소는 조용히 지워지기 쉽습니다. 간판을 모으고 남기는 작업은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록해, 변화의 흔적이 끊기지 않도록 자료로 남기는 일입니다.”

마을데이터 챌린지: 동네를 읽는 방법​

꽃동네에서 시작된 색과 간판의 기록은 ‘동네를 관찰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다른 사람과 나누는’ 실험이었다. 마침 주민 주도의 마을데이터 집적과 활용 방안을 꾸준히 탐색해온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가 여기에 주목했다. 센터는 2025년 하반기 ‘마을데이터 챌린지’를 기획하면서, 꽃동네 사례를 만든 의정부 청년 기획자들을 프로그램 설계와 운영에 참여시켰다.

마을데이터 챌린지의 설계와 진행은 의정부 청년들이 맡았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해온 기록 방식을 참가자들과 나누고, 각 팀이 동네에서 무엇을 관찰하고 어떤 형태로 남길지 함께 다듬으며 현장을 꾸려갔다.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는 그 과정이 운영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그렇게 챌린지는 행정의 수치로만 정의되던 마을을 주민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실험이 됐고, “동네에서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고, 어떤 데이터로 남길 수 있는지”라는 질문을 구체적인 작업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

총 59명, 13팀이 참여한 ‘마을데이터 챌린지’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장면을 ‘비교 가능한 기록’으로 바꾸는 프로그램이었다. 참가자들은 걷고 관찰하며 자료를 모은 뒤, 이를 지도와 그래프, 관찰일지 등으로 정리해 결과를 공유했다. 말로만 “그런 느낌이더라” 하고 지나치던 동네의 변화를, 누가 봐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바꿔보자는 게 목표였다.

참가자들이 다룬 주제는 다양했다. 어떤 팀은 의정부의 은행나무 가로수 데이터를 모아 그 분포를 지도 위에 표시하고, 도심을 따라 이어지는 ‘노란 선’이 어디에서 촘촘해지고 어디에서 끊기는지 읽어냈다. 하천의 징검다리를 따라 걸으며 징검다리 위치와 주변 동선을 기록해, 사람들이 물가로 접근하기 쉬운 구간과 막히는 구간을 정리한 사례도 나왔다. 골목의 형태(굽음, 교차로 구조 등)를 분류해 교통사고 지점과 겹쳐 표시하면서 위험이 집중되는 구간을 드러낸 작업도 있었다. 생활권별 카페 이용 패턴을 모아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 공간의 조건을 비교한 팀도 있었다.

이처럼 지도나 그래프로 정리되자, 동네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비교 가능한 패턴으로 읽히게 됐다. 마을데이터 챌린지에 참여한 임진택(26)씨는 의정부 흥선동의 한 교차로를 하루 동안 지켜보며 횡단보도 앞 대기 시간을 기록했고, 이를 관찰일지와 그래프로 남겼다. “마을을 데이터로 본다는 것은 평소 감으로 넘기던 장면을 확인 가능한 기록으로 바꾸는 일이더라고요.”

행정 자료에서는 노후·정비 대상으로 분류되기 쉬운 공간이지만, 청년들의 작업은 그곳을 고유한 마을색과 상업의 흔적이 남은 장소로 다시 읽게 했다. 강현욱 대표는 “마을이 힘을 얻으려면 결국 자기 자료가 있어야 한다”며 “관심이 끊긴 장소는 지워지기 쉽지만, 기록은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양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변동팀장 ey.y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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