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나는 대신 사들였다…구도심 골목을 되살린 ‘다정한 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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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나는 대신 사들였다…구도심 골목을 되살린 ‘다정한 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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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25) 충주 성내동 관아골
충북 충주 성내동 관아골 뒷골목에서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담장마켓’이 열린다. ㈜보탬플러스, 관아골친구들 제공
충북 충주 성내동 관아골 뒷골목, 카페 ‘세상상회’ 앞마당이 북적거린다. 낡은 한옥과 적산가옥 사이 좁은 길을 따라 아기자기한 노점상이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커피 볶는 향이 퍼지고, 다른 쪽에서는 지역 작가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굿즈들이 반짝였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열리는 ‘담장마켓’의 풍경이다.
10년 전만 해도 오후 6시만 되면 불이 꺼지고 비행 청소년들이 몰려들어 지역 주민들조차 발길을 끊었던 ‘담배 골목’이, 이제는 전국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앞다투어 찾아오는 ‘성지’로 바뀌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9년 전, 아무 연고도 없는 충주에 짐을 푼 세상상회 대표 이상창(43)씨가 있다.


깨끗한 도화지 같았던 동네
충주와의 첫 만남은 ‘일’이었다. 조경과 지역 활성화를 공부한 이상창씨는 서울의 한 컨설팅 회사(지역활성화센터)에서 일하며 전국의 농산어촌 활성화 사업을 도맡았다. 특히 2015~2016년께, 충주시의 첫 도시재생사업인 ‘성내·충인동 도시재생사업’의 총괄기획 PM(프로젝트 매니저)을 맡으면서 충주는 그의 단골 출장지가 됐다. 도시재생 전문가로 커리어가 가장 빛나던 순간, 그는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아내 역시 갑상선암으로 투병하게 됐다.
쉬어야 했다. 문제는 ‘어디서’ 쉬느냐였다. 부모님은 고향인 구미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싫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루저’가 되는 것 같았어요. 제주, 통영 같은 여행지도 떠올렸지만 이미 레드오션이었죠. 제주 애월읍에만 숙박업소가 2000개인데, 거기 가서 2001번째 펜션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더라고요.”

그때 떠올린 곳이 충주였다. 그에게 충주는 ‘비어 있어서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하얀 도화지’ 같은 곳이었다.
“충주는 사과밖에 안 떠오르는 블루오션이었습니다. 깨끗한 도화지, 잔잔한 호수 같았어요. 여기에 좋은 파장만 끼치면 굉장히 주목받기 좋겠다는 생각이 생겼죠.”
이상창씨가 원한 건 단순했다. “오롯이 내가 엉덩이 붙이고, 내가 뭘 해도 안 쫓겨날 안전한 텃밭.” 그래서 그는 13년 동안 비어 있던 낡은 적산가옥을 삼고초려 끝에 사들였고, 2017년 세상상회를 열었다. 전문가로서 ‘계획’만 하던 그가, 직접 ‘플레이어’가 되어 골목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빈집을 사서 들어온 사람들
관아골의 가장 큰 특징은, 청년들 대부분이 ‘세입자’가 아니라 ‘건물주’가 되어 정착했다는 점이다.
지역활성화 연구소 ‘로켓츠’를 운영하는 김재원(40)씨는 이를 관아골만의 강점으로 꼽았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선 청년들이 동네를 기반으로 활동해도 “결국 이용만 당하고 나가거나, 정작 본인한테 돌아오는 이득이 없어 지쳐 떠나는 경우”가 많지만 관아골은 달랐다. 내가 동네를 살리려 들인 시간이, 곧 내 건물값으로, 내 동네의 활기로 돌아오는 게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거죠.” 이 모델을 그는 “지속 가능한 모델”이라 불렀다.
세상상회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을 ‘요정’이라 부르는 이상창씨는 이들을 새로운 이웃으로 ‘꼬드기는’ 독특한 전략도 썼다. 장래가 불투명해 고민하던 천체물리학 전공의 한 요정에게는 “나랑 같이 장사하자”고 제안했다. 돈이 없다는 말에 “부모님을 모셔 오라”고 했다. 부모님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화한 끝에, 그는 “자녀에게 나중에 물려줄 유산을 지금 미리 투자하라”고 설득해 인근 건물을 매입하게 도왔다. 그렇게 독립한 ‘알바 요정’ 5명이 현재 골목 곳곳에서 사진관, 스테이, 카페 등을 운영하고 있다.


거꾸로 흐른 골목
한 채 두 채 사들인 건물들은 골목 바깥으로 뻗어 나갔다. 세상상회에서 5분 거리, 버려진 여인숙을 개조해 만든 ‘로컬종합상가 복작’은 그 확산을 상징한다.
이곳을 운영하는 유순상(45)씨는 취미미술 화실을 5년쯤 운영하던 2016년, 거리에 붙은 도시재생 현수막을 보고 도시재생대학에 참여했다. 그 모임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났다. 서양화를 전공해 늘 혼자 작업하던 그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개인적인 삶, 개인적인 생각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다가, 도시재생대학에서 다양한 군상을 만나면서 알았어요. 개인적으로 하던 일을 같이 하면서 누리는 즐거움을요.”
유순상씨는 관아골이 여느 ‘뜬 동네’와 정반대 길을 걸었다고 짚었다. 보통은 예술가가 먼저 들어와 동네를 살리고, 상권이 들어차면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 쫓겨난다. 관아골은 거꾸로다.
“우리는 문턱 낮은 카페가 먼저 들어왔어요. 누구나 커피 한잔 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생기고, 그다음에 공방, 상업공간이 오고, 세번째로 창작자 기반의 창업이 들어왔어요. 의도한 건 아닌데, 자연 발생적으로 말이죠.”
10여 년 전의 자신처럼 혼자 분투하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기운을 보태는 ‘치어업(응원)’의 자리를 내주고 싶어 그는 복작을 열었다. 복작 안에는 영상 스튜디오, 독립서점 ‘빈칸’ 등 창업 공간 7개가 들어찼다. “한 공간에 있으면, 그 자체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잖아요. 나랑 꼭 같이 뭘 안 해도, 동료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스케일업이 아니라 ‘스프레드 아웃’
골목 곳곳에 흩어져 있던 관아골 가게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엮였다. 처음엔 “관아골 세상상회 가자”는 ‘점’이었던 것이, 지금은 “관아골 가자”는 ‘면’이 된 것이다.
처음부터 누군가 계획한 거대한 그림은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실험을 하며, 10년을 서로가 지켜봤을 뿐이다. 그 사이 “해볼 수 있는 건 웬만큼 다했다.”(이상창씨) 정부 지원사업도, 멤버끼리 돈을 갹출한 마켓도, 유명 건축가와의 콜라보도. 그렇게 작은 성공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자 확신이 왔다. “이거 우리끼리 해도 되겠다.”

그러나 방식은 통념과 달랐다. 한 명이 뾰족하게 튀어 올라 모두가 거기 올라타는 ‘스케일업’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다 같이 잘되는 ‘스프레드 아웃’이라는 전략이었다
“누구 하나 뾰족하게 잘나가서 다들 거기 승차하는 분위기가 아니더라고요. 그러면 펼쳐지는 게 낫겠다 싶었죠.”(이상창씨)
그 결론이 모인 게 동네 브랜드 ‘애매(EMME)’와 협동조합에서 출발한 주식회사 ‘보탬플러스’다. 두 조직을 이상창씨는 오케스트라에 빗댔다. 약 20~30명이 1년 365일 중 80~90%는 자기 가게를 안 망하게 하는 ‘본캐’에 쏟고, 나머지 10~20%는 동네를 위한 ‘부캐’ 활동에 쓴다.
“카페 사장이 카페 일만 하면 되는데, 왜 자꾸 이웃을 얘기하고 동네를 얘기하느냐는 말을 들어요. 그런데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동료를 만드는 게 결국 이 골목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빈집 골목이 ‘천억짜리 마을’로
관아골의 변화에는 지방정부의 지지도 한몫했다. 충주시는 빈 점포 리모델링 비용을 지원하는 한편, 청년들이 원하는 곳에서 창업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줬다.
“보통 담당 공무원이 1년이면 바뀌는데, 충주에서는 한 분이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7년 넘게 ‘라포(신뢰 관계)’를 쌓았어요. 공무원이 지지자가 되어주고, 청년들은 실적으로 보답하는 상부상조의 관계가 만들어진 거죠.” 김재원씨의 설명이다.

성과는 숫자로도 나타났다. 네이버 검색어 트렌드를 보면 2016~2023년 ‘관아골’ 검색량은 50배 늘었고, 같은 기간 성내동 공실률은 50%에서 12%로 떨어졌다. 또 해마다 200팀 이상이 지역재생 비결을 배우러 관아골을 찾는다. 충주시는 이 사례로 2023년 ‘생활권 단위 로컬브랜딩 활성화 지원사업’에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그렇게 관아골은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사업부터 행정안전부 로컬 브랜드 사업까지 약 300억원의 정부 지원 사업을 유치했다. 골목의 느슨한 결속이 주목을 받으면서, 10년간 4개 부처 장·차관이 다녀갔고, 올해는 청와대에서 관아골 사례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천억대 매출을 올리는 테크 스타트업 창업가들 사이에서, 이상창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카페 하나가 10억씩 버는 가게 100개가 모인 ‘1천억짜리 마을’을 꿈꿉니다. 관아골을 한 명의 소상공인 브랜드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관아골 브랜드’로 봐주십시오. 그게 로컬 생태계니까요.”

골목 온도를 1도 높이는 다정한 참견
로컬 생태계를 직접 엿볼 수 있는 ‘관아골 여름소풍’이 6월6일부터 14일까지 성내동·성서동 일원에서 열린다. 외부 기획사가 아니라, 관아골에 살고 가게를 운영하고 작업하는 상인·예술가·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채운 행사다. 골목 안 공방 작가들이 종이공예·향수·누름꽃·캘리그라피·레진공예를 가르치고, 오래 산 주민과 공간전문가가 함께 골목을 걸으며 동네의 역사와 구옥 리모델링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번 행사의 콘셉트 한 줄이 관아골이라는 동네를 그대로 압축한다. “거창한 공공미술 대신, 골목 온도를 1도쯤 높이는 다정한 참견.”

관아골 변화의 출발점이었던 이상창씨의 남은 꿈은 의외로 소박하다. “젊은이들이 실험하고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가는, 뭘 해봐도 괜찮은 동네. 그게 관아골이라는 것. 그거 하나는 남기고 싶어요.”
30년째 인구 20만에 멈춰 ‘충주 하면 사과’밖에 떠오르지 않던 도시 한복판. 아무 연고도 없이 흘러든 청년들이 빈집을 한 채씩 사들여 골목의 온도를 1도씩 끌어올렸다. 평일엔 일상이 흐르고 주말이면 마켓이 펼쳐지던 그 9년 사이, 하얀 도화지는 어느새 오색 그림으로 물들었다.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이 함께 참여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역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청년·여성·노인 등 다양한 주체가 환경·문화·교육·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협력 프로젝트,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동네의 특별한 현장, 꼭 알리고 싶은 공동체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동네 이름, 추천 이유, 간단한 소개(사람·단체·프로젝트 등)를 ejung@hani.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글·사진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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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관련 기사 링크주소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623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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