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가 어디에 있는 섬이고?”

1996년,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휩쓸던 아이들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경북 청도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온 아이들이 이토록 대단한 실력을 뽐낼 수 있는지 모두 궁금해했다. 30년이 흐른 지금, 아이들은 어엿한 예술가로 성장해 청도를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가족이 되기 위해 시작한 국악

1995년, 단장 구승희(42)씨가 6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다섯살 여동생과 생일이 두 달 빠른 오빠가 생겼다. 구씨와 임씨, 성이 다른 가족이 결성된 것이다. 도시를 떠나 고향 청도에 자리를 잡은 아버지는 서로 어색하게 겉도는 형제들을 위해 특별한 선택을 했다.

“할아버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권했지만, 아버지는 ‘여럿이 같이 하는’ 사물놀이를 고집했어요.”

구승희씨가 당시를 회상했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줄 음악적 요소가 필요했고, 그것이 사물놀이였다. 그렇게 ‘온누리국악예술인(이하 온누리)’이 탄생했다.

처음에는 가족 사물놀이패였지만, 시골이라 할 거 없던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아이, 아버지한테 맞아 머리에 상처가 난 아이 등 여러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학년마다 한 반밖에 없었던 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였어요. 아버지가 지어놓은 식당 별채가 우리 합숙소가 되었죠.”

온누리국악예술인의 공연 모습
온누리국악예술인의 공연 모습

전국을 뒤흔든 시골 아이들

사물놀이를 배운 지 1년 만에 대구 경북대회에서 1등, 2년째 되는 해에는 남원에서 열린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남원 예선무대에서 심사위원들을 모두 일으켜 세워 박수갈채를 받았다. 국악의 본고장 전라도에서 벌어진 이 일은 당시 국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국악이라는 게 경상도는 되게 불모지잖아요. 전라도는 대가들이 많은데... 그래서 더 신기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화려한 조명 뒤에는 혹독한 연습이 있었다.

“등교 전 1시간 연습, 방과 후 잠들기 전까지 연습... 아버지의 북채는 종종 회초리가 되기도 했어요.”

악장 임형석(42)씨가 말했다. 학교에서는 소풍도, 수학여행도, 야영도 못 갈 때가 많았다. 친구들과 떡볶이 먹으러 가는 일도 없었다. 학교를 마치면 항상 연습해야 했고, 1년에 설날과 추석만 쉴 수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고 방송에도 자주 나갔지만, 안에서는 되게 힘들었어요.” 구승희씨가 털어놓았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북대 국악과에 진학한 단원들은 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을 맛봤다. “대학교 친구들이랑 술도 한잔하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거죠.” 임형석씨의 말이다. 구승희씨의 고백이 이어졌다. “우리가 한 것은 예술보다는 기능적인 요소가 더 많았던 걸 깨달았죠.”

단원들이 공부할수록 아버지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옛 방식으로 온누리를 운영하면 안 하겠다며 단원들이 떠났다. 청도의 빈 폐교를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게 됐다.

온누리국악예술단 프로필 사진
온누리국악예술단 프로필 사진

“우리가 다시 온누리를 하자”

대학 졸업 후, 구승희씨가 먼저 움직였다. “아쉬운 거예요. 과거 온누리에선 어디 가나 인정받았는데....” 청도로 돌아온 그는 단원들에게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대표는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임형석씨는 군대를 갔고, 자연스럽게 구승희씨가 떠안았다.

조건은 명확했다. ‘아버지와는 손을 뗀다.’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독립했다. 하지만 막막했다.

“어려서부터 악기만 해서 일을 뭘 할 줄 모르는 거예요.” 구승희씨가 말했다. 운동선수처럼 합숙하며 악기 연습만 했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과 마주한 것이다.

2012년 정기연주회은 모든 측면에서 전례 없는 성공이었지만, ‘연주만 하는 단체’로는 한계가 있었다. 2015년 청도군청을 찾아갔더니 문화예술 담당자가 제안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게 있다더라.”

경북 지역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설계·지원해온 박철훈 지역과소셜비즈 대표가 연이 닿았다. 박철훈 대표가 물었다.

“옛날에 완전 스타였던 그 온누리 맞나요?”

“네, 그런데 지금은 그만큼 유명하진 않고요...”

“포기 안 할 자신 있어요?”

“그럼요.”

“우리 어린시절보다 더 힘든 게 있을까 싶었어요.” 구승희씨가 당시를 떠올렸다. “우리 지역에서 예술로 성장하고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어요.”

2016년 5월, ‘온누리국악예술인협동조합’이 법인으로 설립됐 현재는 인증 사회적기업으로서 정부 지원 없이 자립 운영하고 있다. 조합원은 6명, 직원은 3명, 회원은 100여 명 정도다.

10년 넘게 거르지 않은 ‘토요 어린이 국악 클래스’ 모습.
10년 넘게 거르지 않은 ‘토요 어린이 국악 클래스’ 모습.
온누리국악예술인 야외공연 모습
온누리국악예술인 야외공연 모습

‘지속 가능한 예술’을 꿈꾸다

매주 토요일이면 청도 골목골목에서 아이들이 국악기를 들고 모여든다. 10년 넘게 거르지 않은 ‘토요 어린이 국악 클래스’다.

이곳의 문턱은 낮다. 한 달에 5만원이면 매주 국악을 배울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었다. 구승희씨는 “우리 청도 아이들이 돈 걱정 없이 수준 높은 예술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단원 박수민(28)씨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마을 아이들이라는 애정 하나로 가르치는 곳은 아마 여기가 유일할 거예요.”

가르치는 이들의 진심도 뜨겁다. 단원 임정아(39)씨는 창원에서 청도까지 매주 달려온다. “제가 어릴 땐 안 혼나려고 악기를 잡았다면, 요즘 애들은 진짜 배우고 싶어서 와요. 그 반짝이는 눈을 보는 게 정말 좋죠.”

단원들에게 음악은 생계 그 이상의 의미다. 임정아씨는 음악이 주는 ‘합(合)’의 힘을 믿는다. “곡이 완성될 때 느껴지는 화합의 에너지는 실로 대단해요. 단원들끼리 투닥거리다가도 공연 한 번 딱 하고 나면 자연스레 풀리거든요. 그게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이죠. 제 아이들에게도 꼭 물려주고 싶은 감각이에요.”

온누리의 반경은 이제 마을 전체로 넓어졌다. 농림부 사업인 ‘시골 언니 프로젝트’를 3년째 운영하며 도시 여성들과 청도를 잇는 문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구경만 하고 떠나는 관광이 아니다. 지역 멘토들과 끈끈하게 연결해 주는 이 프로그램 덕분에 벌써 여성 7명이 청도에 둥지를 틀었다.

온누리국악예술인이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과 함께 기념촬영하는 모습.
온누리국악예술인이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과 함께 기념촬영하는 모습.

최근 열린 창단 30주년 공연은 온누리가 쌓아온 세월을 증명했다. 객석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관객들은 “이렇게 멋진 공연을 왜 공짜로 보여주느냐”며 기분 좋은 타박을 보냈다. 한 80대 어르신은 단원의 손을 꼭 잡고 “죽기 전에 이런 공연을 눈앞에서 보다니 정말 고맙다”며 말했다.

온누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거창한 구호가 아닌 아이들의 한마디다. “청도의 장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온누리가 있어서 좋다’고 답하더라고요. 그 한마디가 우리를 버티게 합니다.” 구승희씨가 말했다.

어린 시절,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악기를 들었던 아이들. 이제 그들은 지역을 지키는 든든한 예술가이자 기획자가 되어, 청도의 대지에 ‘문화와 풍류’라는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다.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이 함께 참여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역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청년·여성·노인 등 다양한 주체가 환경·문화·교육·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협력 프로젝트,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동네의 특별한 현장, 꼭 알리고 싶은 공동체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동네 이름, 추천 이유, 간단한 소개(사람·단체·프로젝트 등)를 ejung@hani.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글 정은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기자 ejung@hani.co.kr, 사진 온누리국악예술인협동조합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