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버려진 마을을 20만명 찾는 핫플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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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버려진 마을을 20만명 찾는 핫플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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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①광주 남구 양림동
‘우리 동네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지방정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이 함께 참여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장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역 구성원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변화와 혁신을 이끌고,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해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청년·여성·노인 등 다양한 주체가 환경·문화·교육·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힘을 모으는 협력 프로젝트,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동네의 특별한 현장, 꼭 알리고 싶은 공동체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동네 이름, 추천 이유, 간단한 소개(사람·단체·프로젝트 등)를 ejung@hani.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광주 남구 양림동 펭귄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한옥의 마루에 천장에 닿을 듯 커다란 펭귄 조형물이 앉아 있다. 여자아이는 펭귄의 발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남자아이는 펭귄 옆 마루에 앉은 아빠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햇살 가득한 지난 18일, 자전거 탄 풍경의 2001년 노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 울려 퍼지는 마을에서 가족은 한가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펭귄마을 골목 곳곳에는 펭귄 조형물과 벽화, 고장 난 벽시계, 찌그러진 밥상 등 1970~80년대의 잡동사니를 활용한 정크아트 작품이 가득하다. ‘유행 따라 살지 말고 형편 따라 살라’와 같은 인생의 지혜를 담은 글귀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어릴 적에 즐기던 달고나와 쫀드기, 뽑기, 알사탕 등 추억의 과자를 진열해놓은 ‘펭귄 주막’은 향수를 자극한다. 펭귄 주막에서는 천 원이면 대부분의 간식거리를 살 수 있다.
“마을 터줏대감들이 다 앉아서 놀던 자리예요. 남편이 들락거리던 단골손님이었죠. 주인아줌마가 나이가 들어 못하게 되니까 자기가 한다고 맡아버렸어요.”
7년째 펭귄 주막을 운영해온 신상연씨의 말이다. 손님이 천 원짜리를 내고 과자를 사서 아이에게 건네자 금세 웃음이 번진다. “아이들 웃는 소리가 너무 좋아요. 까륵까륵 웃는 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아빠와 아이가 추억을 쌓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마을 전체를 전시관으로 만든 촌장의 실험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펭귄마을의 시작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60대 이상 어르신들만 사는 마을에 빈집이 늘고, 한 집에 불이 나 흉물스러운 기둥만 남게 됐다. 2004년부터 양림동에 살던 김동균(71) 촌장이 나섰다. 음료수 캔을 오려 나사와 경첩으로 꾸며 펭귄·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담벼락에 붙였다. 부서진 액자, 오래된 주전자, 낡은 라디오, 전화기 등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 전시했다. 10~2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는 마을 전체가 하나의 전시관이자 추억의 공간이다. 한해 20만명이 이곳을 찾는다.

“재미 삼아 시작했는데, 동네 분들이 좋다고 하니까 점점 더 거리를 넓혀가면서 작업을 이어갔죠. 하다 보니 손재주도 생기더라고요.” 김 촌장은 힘이 닿는 한 계속 펭귄마을을 지키겠다고 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펭귄마을’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우리 동네 한 어르신이 걷는 모습이 펭귄을 닮아, 우리끼리 펭귄마을이라고 부르자고 했어요. 독특한 이름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왔죠.”
—언제부터 방문객이 왔나?
“2016년부터 몰려들었어요. 마을 주민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애들이 너무 이쁘다, 이쁘다 하면서. 옛날에는 한 집에 대여섯 가족이 살았는데 다 나가버려서 얘들이 없잖아요. 다시 애들 웃음소리가 들리니까 마을에 활기가 돌았죠.”
—반대하는 주민은 없었나?
“처음에는 시끄럽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셨는데, 동의서를 다 받았어요. 전시품도 벽에 못질하지 않고 뗄 수 있게끔 붙이겠노라 약속하고요. 집에 수도꼭지 고장 나면 고쳐주고 형광등도 새로 달아주면서 친근감을 표시하니까 다들 허락해줬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 같으면 못하지요.”
—촌장으로서 일과는?
“매일 아침 6시 넘어서 나와서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오래된 작품을 정리하고 교체할 것은 바꾸죠.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벽에 걸려 있던 것들은 발하고 허름해져서 망가져요. 온종일 열려 있는 촌장실은 주민과 방문객이 찾아와 쉬어가는 사랑방 역할을 하죠. 바빠야 고민할 시간이 없어요.”
—수십 개의 시계가 걸려 있는 벽이 인상적이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주변 동네에서 버려진 것들을 주워와서 걸었어요. 요즘은 시계 자체를 잘 쓰지 않으니까 많이 버려서, 시계 자체가 추억이 됐잖아요. 그리고 멈춘 시계라서 시간이 다 다르고. 그런 시계가 난 좋더라고요.”
—힘든 점은 없나
“나이가 먹으니까 하루하루가 달라요. 60대는 날아다녔는데, 70대는 점점 움직이기도 힘들고. 그래도 일이 있다는 게 좋고 자부심이 생기잖아요.”
—앞으로의 바람은?
“동네 주민들 대부분이 80살이 넘어요. 20년 정도 지나면 사라진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2대 촌장을 찾는 게 과제입니다. 저 없이도 펭귄마을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2019년에는 광주와 남구, 광주디자인진흥원이 펭귄마을의 낡은 한옥을 리모델링해 10여개의 공방이 입주한 공예거리를 조성했다. 도자기, 유리, 금속, 목공, 섬유, 가죽 등 다양한 분야의 공예품을 전시·판매하고, 방문객은 직접 체험 행사에 참여할 수도 있다. 주말이면 예술체험과 오픈마켓, 프리마켓이 열려 골목은 더욱 활기를 띤다.
죽음의 공간에서 근대문화 발상지로

양림동을 찾은 대다수의 방문객은 펭귄마을을 둘러보고 떠나는 경우가 많지만, 양림동의 진짜 매력과 속살은 그 너머에 있다. 이 동네는 단순히 관광지를 넘어, 광주의 근대사와 예술, 그리고 다양한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한때 양림동은 ‘버림의 공간’으로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전염병으로 죽은 아이들의 시신을 이불에 싸서 양림산에 내다 버리거나, 나무에 묶어두는 ‘풍장’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죽음과 버림의 상징이었던 이 땅은 20세기 초, 선교사들의 정착으로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맞았다.
배유지(유진 벨)과 오기원(오웬)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들어와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면서 광주와 전남 지역에 근대 교육과 의료, 그리고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는 중심지가 됐다. 골목마다 선교사들의 흔적과 더불어 전통 한옥과 근대식 건축물이 어우러져, 10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호남 근대문화의 발상지’로 거듭났다.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1910년 건축 추정)인 ‘우일선(윌슨) 선교사 사택’, 1911년 미국 스턴스 여사의 기부로 세워진 여성교육의 요람 ‘수피아홀’, 1927년 건립된 붉은 벽돌의 ‘윈스브로우홀’, 선교사와 가족들의 예배당이었던 ‘커티스 메모리얼홀’, 그리고 광주 최초의 음악회가 열린 ‘오웬기념각’ 등 다양한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다.
400년 된 호랑가시나무가 있는 언덕길에는 1950년에 지어진 선교사의 사택이 게스트하우스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곳은 넷플릭스 드라마 ‘이두나!’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전통 상류가옥의 멋을 간직한 ‘이장우 가옥’과 독립운동가의 숨결이 남아 있는 ‘최승효 가옥’ 등 한옥 건축도 만날 수 있다.
양림동을 제대로 경험하고 싶다면,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도보 해설 프로그램을 이용해보는 게 좋다. 광주시와 남구청, 광주여성가족재단 등 여러 기관이 각기 다른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관심사에 따라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도보 해설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기회다. 대부분 사전 예약이 필요하고 인원과 일정은 조정이 가능하다.

도보 해설로 진짜 매력을 만나다
특히 ‘광주여성길’을 따라 양림동을 걷다 보면, 기존에 알지 못했던 양림동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 여성들의 삶과 독립운동, 교육·복지 활동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 광주여성가족재단 정미경 사업운영실 차장은 광주여성길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선교사들이 양림동에서 여성 교육을 도왔고, 그 결과 근대적 직업과 사회적 공간으로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선배 여성들의 열정과 헌신, 주체성을 기억·계승하며 다시 걸어보자는 뜻에서 모토를 ‘길 위의 길, 발걸음 위의 발걸음’이라고 정했습니다.” 2022년부터 봄과 가을에 운영하며, 한해 1천명이 찾는다.
광주여성길이 소개하는 인물로는 △광주 이일학교를 설립하는 등 22년 동안 광주의 병자와 여성을 돌본 미국 간호선교사로 서서평(1880~1934) △김마리아가 가져온 2·8독립선언서를 복사해 전국에 배포하다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김필례(1891~1983) △광주 최초의 여성의사인 현덕신(1896~1962) 등이 있다. 1시간 30분가량의 도보 투어는 ‘두홉길’(근대 여성교육), ‘백단심길’(여성 독립운동), ‘홍단심길’(광주학생독립운동과 충장로 여성사) 등 3개의 테마 코스로 운영되며, 3인 이상이 광주여성가족재단 누리집이나 전화(062-670-0532)로 신청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광주여성길 문화해설사인 정슬기(36)씨는 참여자가 양림동의 진짜 매력을 알게 됐다고 말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 “또래 친구들이 카페 가려고 양림동에 왔다가, 문화해설을 듣고 나면 이 동네의 역사에 깜짝 놀라요. 관광지가 아니라 여성의 삶과 역사가 녹아 있는 길이라 해설이 쉽지 않지만, 그만큼 의미가 크죠.”
여러 번 양림동을 방문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도 말하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접하고는 롤모델을 발견했다는 젊은 여성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미경 차장은 “광주여성길은 더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면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5·18 광주여성길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이 길은 광주를 넘어 전국,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어요.”

역사와 예술, 지역 공동체가 어우러져
양림동이 광주 최초의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면서, 이곳은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융합되는 특별한 공간으로 성장했다. 많은 예술인과 문인, 음악가들이 양림동에서 태어나거나 작품활동을 펼쳤다. 음악가 정율성은 1914년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난 뒤 중국으로 건너가 360여 곡을 남겨 중국 3대 음악가로 꼽힌다.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는 김현승 역시 양림동을 ‘고향이자 영적인 저수지’로 여기며 30여년간 머물렀다. 대표작 ‘가을의 기도’는 펭귄마을과 호남신학대학 등 양림동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양림동 골목을 걷다 보면 예술의 향기가 넘실거린다. 광주 남구청이 운영하는 지역 예술·관광 플랫폼인 ‘양림거점예술여행센터’에서 만난 장욱 센터장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양림동에는 예술가들의 갤러리가 17개나 있어요. 현재도 작가들이 많이 살고요.”
예술 전시와 체험 행사가 상시 운영되고, 매주 토요일에는 양림동 특화상품을 판매하는 ‘아트워크’ 마켓이 예술여행센터 앞마당에서 열린다. 마을 전체가 미술관으로 변신하는 예술 축제 ‘양림골목비엔날레’는 2년마다(짝수해) 가을에 진행된다. 양림동 골목 곳곳의 빈집, 한옥, 상점, 공방 등이 전시장으로 탈바꿈해, 주민과 예술가, 방문객이 함께 어우러진다.

방문객을 위한 ‘양림패스(사용 기간 1년)’도 눈길을 끈다. 네이버에서 신청 후 현장에서 수령하는데, 참여 음식점과 카페 등에서 10%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예술여행센터 내에는 물품 보관함, 우산·자전거 대여, 쉼터 등 편의시설도 마련돼 있다. 양림동 ‘스마트투어’ 앱을 설치한 사용자는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관광지, 음식점, 숙박, 축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장욱 센터장은 양림동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여행지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100년 세월을 품은 근대문화유산과 전통문화, 예술문화 등 가진 것이 많은데 너무 알려지지 않습니다. 문화적 자산과 주변 사직공원을 활용한 문화 예술공원을 조성한다면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될 것입니다.”
역사와 예술, 그리고 지역 공동체가 어우러진 양림동, 이 동네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글·사진 정은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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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관련 기사 링크주소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993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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