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도 있다, 철거·재개발 대신 주민 주도로 다시 만든 도시
페이지 정보

서울에도 있다, 철거·재개발 대신 주민 주도로 다시 만든 도시
본문
서울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일대의 봉제공장과 계단식 주택이 이어진 전형적인 서울의 낡은 골목길을 지나 채석장 전망대 ‘카페 낙타’에 다다랐다. 햇살이 가득한 카페에는 예술 작품과 시집이 전시돼 있고, 창밖으로는 한양도성의 능선과 남산, 그리고 저 멀리 서울의 빌딩 숲까지 한눈에 펼쳐졌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지역 주민과 예술가, 여행자들이 어울리는 문화의 장이다. 정기적으로 음악회와 전시회가 열리고, 문화해설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자이자 채석장 전망대 카페 낙타 총괄자인 김태엽(64)씨가 지난 8월26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절개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바로 옛 채석장입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며 산을 깎아 이런 풍경이 만들어졌죠. 낙타처럼 이어졌던 산이 어느 순간 없어지고, 지금은 절개지와 집들만 남아 있습니다.”

뉴타운 갈등, 주민 손으로 해결하다
창신숭인 도시재생은 철거·재개발 대신 ‘사람’과 ‘동네’를 살리는 지역 혁신의 상징적 모델로 꼽힌다. 과거 뉴타운 개발로 인한 갈등과 소외를 딛고, 지역 주민들이 주인이 되어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고 실천에 나선 대표적 ‘주민주도 도시재생’ 사례다.
출발은 2014년 서울시 도시재생 1호 사업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이 지역은 한때 급속한 주택 노후화와 과밀로 주거 환경이 나빠지고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는 등 여러 도시 문제를 앓았다. 하지만 ‘우리는 쫓겨나지 않고 이곳에서 살아가겠다’ ‘지역의 가치를 더 좋게 만들겠다’는 지역 주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변화의 씨앗이 움텄다.
지역 주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며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끝난 2017년부터는 ‘창신숭인 도시재생 협동조합’을 만들어 마을 운영에 나섰다. 창신숭인 도시재생 협동조합 상임이사인 손경주씨는 “현재 138명의 조합원이 함께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으며, 거점 공간은 자체 운영단이 직접 맡고 있다”며 “모두가 ‘주민이 주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주요 사업으로는 거점 공간 5곳(마을카페 2곳, 주민문화공간 2곳, 마을사무실 1곳)을 기반으로 한 공동이용시설 운영, 수익사업, 일자리 창출, 도시재생 해설사 양성, 마을 교육·역량강화 컨설팅, 골목상권 상생 쿠폰 등 지역협치 사업 등을 꼽았다. 거점 공간들은 각각 독특한 색깔을 지녔다. 채석장 전망대 카페 낙타는 서울 도심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서 계절별로 테마가 있는 전시와 공연을 진행한다. 백남준 기념관에서는 미디어 아트 전시, 예술가와의 만남, 창작 워크숍 등 예술 체험 활동이 열린다. 수수헌은 청년과 어르신이 어우러진 맞춤형 복합 커뮤니티로 발돋움한다. 거점 공간들을 찾는 방문객은 2020년 2만784명에서 2024년 14만3558명으로 크게 늘었다.

예술가의 온기, 동네의 온기가 만나는 곳
지난 8월26일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백남준기념관 카페’에는 커피 내음과 함께 동네 이웃들의 정겨운 수다가 가득했다. 이 카페의 최대 매력은 주민 누구나 들어와 편하게 시간을 보내며 동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아침엔 운동 끝낸 분들이, 오후엔 이웃들이 수다 떨러 와요. 커피값은 2000원(아이스 2500원)이라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죠. 우리가 직접 만든 유자청, 생강, 대추차도 내놓으면 좋아하세요.” 이곳에서 8년째 백남준기념관 카페를 운영하는 이종화(72)씨가 말했다.
이종화씨는 도시재생 사업 덕에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이웃들과 함께 카페를 맡았다. 수입은 적지만 동네 정보도 듣고, 함께 일하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공동체에 봉사하는 마음이 컸어요. 지금도 카페지기 5명이 돌아가며 오전·오후 4시간씩 근무해요. 대부분 창신동에서 40년 가까이 살아온 주민들이에요.” 카페지기의 나이는 60~70대로 동네 살이만큼 인생살이도 깊다.
“행사가 있을 땐 본관 툇마루까지 넓게 쓰고, 마당도 개방해요. 여긴 창신1동 사랑방으로 자리잡았죠. 누구나 들어와 앉아 쉬어가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볼 수 있어요.” 이곳은 카페이자 정보 교환소, 그리고 작은 문화공간인 셈이다. 카페 수익 일부는 매년 동사무소 불우이웃 돕기나 아동복지센터에 기부한다.
“과거엔 창신동이 별로 인기가 없던 동네였지만, 백남준기념관이 생긴 후 외국인 관광객과 행사를 찾는 학생들도 많아졌어요. 이 공간이 동네 명물이 되고, 동네가 조금씩 발전했죠.” 이종화씨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마을, 나눔, 일상”…세대 섞이는 수수헌의 힘
숭인동의 수수헌은 마을 사랑방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목요일 점심에는 80~100명 가까운 동네 주민이 드나들고, 평일 저녁이면 청년들의 독서모임, 주말에는 베이킹 클래스가 펼쳐진다. “콘텐츠를 멈추지 않으면 사람이 끊이지 않아요. 때론 운영이 버겁지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지망이 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죠.” 수수헌 운영단 대표 이영호(37)씨의 말이다.
수수헌은 계속 변화해왔다. “초기에는 동네 학부모와 아이들이 많았어요. 피아노, 동양화, 구연동화 등 다양한 수업이 열렸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새로운 인구 유입이 없어서 세대 구성이 달라진거죠.” 이영호씨가 말했다. 수수헌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사랑나눔회, 종로구 보건소와 함께한 건강 프로그램, 밥상 모임 등 행정 지원이 일부 있었기 때문이다.
수수헌 운영단은 원데이 클래스 형식의 취미 모임이나, 청년 소모임 등을 활발히 유치했다. “그림 그리기, 쿠키 만들기, 독서 모임, 영화 감상 등 매주 3~4개 모임이 돌아가요. 예약은 앱으로 받고, 인원은 적게는 3명, 많게는 10명 넘겨요. 시간당 인당 1100원이니까 접근성도 좋아요.”(이영호씨)
또 외국인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을 위한 비빔밥 조식사업도 시작했다. 조식사업을 운영하는 김영랑(33)씨가 봉사자들과 함께 식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준비한다. 값은 9천원. 하루에 많게는 80개까지 팔았다. “외국인들이 봉제 문화가 궁금해서 마을을 방문하면서 게스트 하우스가 굉장히 많아졌어요. 가까운 곳에 음식을 먹을만한 곳이 있는지를 찾는 모습을 보고 외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비빔밥을 하게 됐습니다.”(김영랑씨)

지속가능 도시재생의 해법은 ‘사람’
행정 지원사업이 줄어드는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협동조합을 유지하는 힘으로 손경주씨는 “사람”을 꼽았다. “일반 이익조합과 달리 수익 배당을 하지 않고, 발생한 이익은 지역에 재투자합니다. 외부의 재개발 등 위기가 상존하지만, 오히려 공동의 목표와 신뢰, 애정이 강한 멤버들이 뭉치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각 동의 리더, 청년, 시니어 등 다양한 주민이 동참해 분쟁도 줄고, 공적 마인드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습니다.”
앞으로 보완해야 할 조건은 비전으로 설명했다. “외부 사업이 축소된 만큼, 지역 자체 수익과 로컬 브랜드, 크리에이터 육성이 중요해졌습니다. 빈 점포를 창작자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작은 네트워크 뮤지엄 등 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확대하고 싶어요. 역사와 마을, 현대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성장하고자 합니다.”
창신숭인 도시재생 협동조합의 다양한 실험과 경험은 ‘존치와 혁신’, ‘공존과 상생’, ‘주민의 힘’으로 도시의 미래를 열어가는 새로운 모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글·사진 정은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기자 ejung@hani.co.kr
관련링크
-
한겨레 관련 기사 링크주소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18701.html
4회 연결
- 다음글쓰레기를 돈으로, 자부심은 덤으로 25.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