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
‘디지털 월세’ 된 토큰…돈 내는 만큼 똑똑해진다?
페이지 정보

‘디지털 월세’ 된 토큰…돈 내는 만큼 똑똑해진다?
본문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인공지능대회(WAIC)에 참가자들이 서 있다. 상하이/로이터 연합뉴스
AI 접근권 불평등 우려
유료-무료 AI 사이
벌어지는 역량 격차
폭발적 토큰 수요
가계엔 고정비 부담
응용언어학자 김성우 박사는 최근 인공지능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봤다.
“TESOL(국제영어교사 양성과정)의 탈식민화를 개관하고 이를 영어 교육 맥락에 적용할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학술에세이”의 초안을 써달라는 요청을 동일한 인공지능 모델의 유료·무료 2가지 버전으로 지시했다.
답변은 차이가 많이 났다. 무료 버전은 △탈식민지화의 개념 △지식생산과 커리큘럼의 문제 △영어의 도구성 제고 △한국 영어교육에의 적응 가능성 △교육과정의 지역화 등을 쟁점으로 구분한 뒤 각 항목마다 서너개의 짧은 요지를 붙여 3쪽(A4 기준)에 담았다.
유료 버전은 총 10쪽에 이르렀고 참고 문헌도 풍부했다. “문제제기: 탈식민화는 ‘영어를 버리자는 주장이 아니다’”라는 눈길 끄는 질문에서 출발해 “규범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규범의 권력을 가르치는 것” “미국·영국 문화에서 권력의 언어생태로” “한국인 영어교사는 결핍된 원어민이 아니다” 처럼 쟁점을 심도있게 정리했다. 무료 모델이 평이한 요약 노트라면, 유료는 핵심 질문을 던지고 구체적 사례로 설명하는 짜임새 있는 교재였다.
김 박사는 “강의를 하면서 조별 활동 결과물을 봤더니 인공지능 유료 모델 사용 여부에 따라 답변 길이가 상당히 달랐다”며 “돈을 내고 구독을 하느냐에 따라 과제를 처리하는 속도·품질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고도화된 인공지능이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일상에도 스며들면서 ‘인공지능 기회 격차’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인공지능의 성능이 달라지고 그만큼 학습·업무 역량도 벌어진다는 것이다. 과장 섞인 우려이긴 하나, 일각에선 어떤 버전을 쓰느냐에 따라 내신성적도 차이 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인공지능 서비스 질을 좌우하는 핵심 지표는 ‘토큰’이다. 토큰은 인공지능이 연산을 처리하는 최소 단위로, 더 복잡한 연산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토큰이 필요하고 이는 시간과 비용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통신사들이 데이터 제공량 기준으로 휴대폰 요금을 책정하는 것처럼, 인공지능 기업들도 토큰 사용량에 따라 요금제를 정한다. 물론 대부분의 인공지능은 무료 사용이 가능하고 여전히 다수 사용자가 무료 모델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코딩처럼 복잡한 업무를 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유료로 전환하는 추세다. 유료 모델이 추론·기억·이미지 및 동영상 생성 능력 등에서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유료 이용자 수는 가파르게 느는 추세다. 2024년 5~8월 ‘미디어패널조사’(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이용자는 전체 응답자 중 13.7%였고, 이중 유료 이용자는 13.7%였다. 이듬해 2025년 같은 조사에선 이용자가 31.6%로 급증했고, 이중 유료는 13%였다. 전국민을 기준으로 유료 이용자를 따져보면 2024년 1.8%에서 2025년 4.1%로 2배 이상 늘었다. 주거·통신비처럼 인공지능 토큰 또한 ‘디지털 월세’로 고정 생활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가계 부담도 늘어난다. 월 20달러 클로드 프로 요금제를 쓰고 있는 인공지능 교육 강사 이해범씨는 한겨레에 “30분 강의 자료를 준비하는데 5시간 만에 토큰이 다 소진됐다”며 “비용에 대한 압박감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월세 생활자가 늘어나는 건 불가피한 흐름으로 보인다. 우선, 폭발적인 토큰 사용량 때문이다. 인공지능 산업의 무게중심이 학습에서 추론으로 이동하고, 사용자를 대신해 업무를 수행하는 ‘에이전틱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 도래하고 있다. 에이전트 인공지능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토큰을 소비한다. 인공지능 모델 통합플랫폼인 오픈라우터 통계를 보면, 최근 1년은 그야말로 ‘토큰 빅뱅’의 시기였다. 전세계 토큰 사용량은 2024년 8월 1000억개를 넘어섰는데 1년여만인 9월 말엔 5조를 돌파했다. 올해 2월초엔 10조, 3월말에는 27조로 치솟았다.
이처럼 급증하는 토큰 수요를 맞추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공지능 기업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받아야 한다. 앤트로픽·오픈에이아이의 경우 매출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지만 여전히 적자다. 앤트로픽은 2028년, 오픈에이아이는 2030년에야 흑자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된다. 토큰 가격 조정, 광고 도입 등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토큰 사용 증대가 직접적인 비용부담으로 작용하는 건 민간·공공 모두에게 숙제다. 특히 대대적인 노동시장 재편 흐름 속에서 개인들은 인공지능 역량을 쌓아야 한다는 거센 압박을 받고 있다. 이들을 각자도생의 정글에 방치하지 않으려면 공공의 지원이 필요하다. 김성우 박사는 “인공지능은 사용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서비스라기 보다 수도·전기 같은 필수 인프라지만, 공급자가 공공이 아닌 빅테크라고 봐야 할 것 같다”며 “경제적 조건에 따라 품질 차이가 큰 수돗물을 마시거나 전력 공급 안정성이 현저히 차이가 날 경우 사회 문제가 되는 것처럼 인공지능도 양·질에서 보편적인 접근권을 고려해봐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공지원을 통해 인공지능 접근권의 형평성을 높이는 문제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할 뿐 아니라 글로벌 빅테크에 정부 예산을 쏟아붓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추진 중인 ‘국가대표 인공지능’ 프로젝트는 내년에야 개발 기업 2개팀을 선정하는 일정이라 상용화 단계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유재연 사회분과위원장은 “국가가 인공지능 무료 사용권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용도·목적에 따라 바우처를 지급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인공지능 사용 수준에 따라 생산성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창작자 중심으로 보편적 바우처를 지급하는 것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이주현 한겨레 사람과디지털연구소 기자 edigna@hani.co.kr
관련링크
- 이전글[두런두런 AI ⑧]AI로 보는 나의 ‘운명 3종’ 26.05.12
- 다음글“토큰 많이 쓴다고 일 잘하는 건 아니다” 26.05.11

뉴스룸